줄거리:
기쁨의 도시라 불리는 인도 최대의 도시 캘커타. 그러나 그 이면에는 4백만 명이 넘는 절대 극빈자가 지독한 가난과 싸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곳에 맨손과 맨발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력거꾼 ‘샬림’이 있다. 아내의 병원비, 가족의 생활비를 벌면서 틈틈이 돈을 모으고 있는 ‘샬림’의 꿈은 하루 빨리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장만하는 것.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인샬라’를 마음에 새기며 매일같이 지열 70도의 뜨거운 아스팔트, 세차게 몰아치는 빗줄기를 뚫고 꿈을 향해 맨발로 거리를 나선다. 그러나 아내의 병은 차도가 보이질 않고, 설상가상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뭄바이로 떠났던 큰 아들은 신종플루에 걸렸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아들은 가방공장의 재봉사다. 아이들만 칩거하는 공장에서 아파하는 아들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려하지만, 아들이 아파서 약으로 쓴 비용이 이자가 붙어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래서 혼자 샬림이 돌아온다. 샬림은 꿈이 있다. 삼륜차를 사서 인력거를 그만두는 것이다. 5년만 더 벌면 될 것 같은데......
행복과 슬픔이 함께 가는 길, 그 곳에서 맨발의 인력거꾼을 만나다!
기획, 촬영, 편집까지 12년, 이성규 감독의 집념이 일궈낸 감동대기록!
1999년 인도에서 <오래된 인력거>의 주인공 ‘샬림’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이성규 감독은 지열 70도의 아스팔트 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맨발로 인력거를 끄는 샬림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력거꾼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샬림을 단순한 피사체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써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모습까지 감동적으로 카메라에 담아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집념은 젊은 인력거꾼 ‘마노즈’와의 인연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마노즈는 자신의 아버지가 지주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청년이었다. 이를 알게 된 이성규 감독은 카스트 전쟁을 촬영했던 10년 전 자료를 뒤져 어린 마노즈의 모습을 찾았고, 그의 사연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운명 같은 만남으로 더욱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오래된 인력거>는 다양한 삶들이 중첩되어 있는 캘커타의 인력거꾼들의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인력거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마노즈, 어릴때 아버지가 지주의 총에 죽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그 때 나이는 10살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성장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성장했는지 모르지만. 돈을 벌러 캘커다에 왔지만, 샬림처럼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꼭 필요한 말만 한다. 마음을 닫고 있는 그런 마노즈에게 샬림은 큰아들 같은 마음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입은 여전히 닫는다.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샬림에게 마음을 연 마모즈는 자신의 과거, 아버지의 죽음을 얘기한다.
샬림이 묻는다. "만약에 네 앞에 아버지를 죽인 지주가 있다면 넌 어떻할꺼냐? "
관객은 침묵하고 마노즈를 주시한다.
마노즈는 말한다. 도망갈거라고.
자신의 큰 산이었던 아버지도 죽였는데 자신 하나 어떻게 하지 못하겠냐고. 그는 여전히 열살짜리 겁많은 아이였던 것이다.
관객은 목울음을 운다. 우리가 기대했던 말이 아니지만, 어린 10살의 마노즈를 위해......
마노즈는 인력거에 사람이 아닌 닭을 운반하면서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을 깨닫는다.
마지막 남은 돈으로 아버지를 위한 위령제를 치루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나는 처음 이 영화를 볼 것인가 말것인가 고민을 했다. 이 불편한 진실, 인도.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언젠가 내 여행 종착지는 인도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난 자꾸 인도 주변 언저리를 배회했다.
갈 수 있을까? 정말, 그곳에.
하지만, 내 또래의 감독이 12년이라는 시간을 지내면서 찍은 거라면
영상보다는 다른 행간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 보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똑바로 화면에 시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영화는 샬림이 맨발로 캘커다를 달린다.
낡은 인력거, 맨발의 샬림과 인도의 낡은 포장도로에 거친 돌들.... 깡마른 몸에 끊임없이 달려가는 맨발.(신발을 신고 달리면 더 힘이 들고 빨리 달릴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샬림이 밀크티를 마시면서 감독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화면의 샬림은 여느 인도인과 다르게 긍정적이다.
그런데 신의 가호라 믿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그에게 마지막 갖고 있던 기대감이 무너지는 절망에서 감독이 자신을 찍는 그 모습에 화가 났을 거다. 그러나 카메라는 계속 돌아간다.
감독은 설득한다. 당신은 내 친구라고. 무슨~ 친구?
아마, 처음 이방인이 샬림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으려 할 때 샬림은 힘이 들어도 꿈을 이룰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자신을 찍는 것을 허락한거고. 그때는 친구라 생각도 하고.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꿈은 제자리다. 아니, 더 퇴보다.
아내의 병원비를 위해 자신의 꿈을 버렸다. 그 꿈은 그냥 꿈이 아니라 샬림이 살아가는 생명이다.
나이가 들면 계속 인력거를 끌 수 없다. 인력거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이다.
인도는 인력거가 가난의 상징이라 정책적으로 없애려고 한다.
샬림은 생각한다. 삼륜차를 운전하면 돈도 벌고 오랫동안 일 할 수 있다.
삼륜차의 꿈이 가까운 시일내에 이루어질 수 있다.
5년만 더 고생하면 꿈이 이루어진다. 그 생각만 하면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다. 샬림은 나름대로 행복하다.
샬림은 폭우를 좋아한다. 비가 오면 길을 건너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인력거를 찾는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처럼, 샬림은 신이 나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캘커타를 달린다.
현진건의 아내처럼 샬림의 아내도 환자다.
풍토병이 발생했을때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얻은 지병과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삼륜차를 사기 위해 모아논 돈은 아내의 치료비로 야금야금 없어진다. 밑빠진 독처럼.
아들을 위해 뭄바이의 공장에서 빼오지 못했던 그 돈을.
삼륜차를 사기 위해 모아논 이 돈은 그냥 돈이 아니다. 샬림의 생명줄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계속되는 고행,
죽음의 끈이 끊어질때까지 계속 되는 것이다.
차라리, 생각이 없는 인간이면, 그냥 그렇게 살아갈텐데.
이 숙명같은 가난 앞에 인간이 초라하다.
하지만, 난 자꾸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다. 저 숙명 같은 계속 이어지는 저 절망의 나락을 꼭 찍어야 했는지.
우리가 이렇게 타인의 인생을 들여다 보아도 되는지.
내가, 만약 샬림이라면 보여주고 싶지 않다. 절대로.
내 인생에 누군가 젖은 손수건으로 연민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개입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샬림도 그렇지 않았을까.
영화는 픽션이 더 좋다. 논 픽션은 불편하다.
픽션의 영화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덜 불편하고 위로할 수 있다.
모른다고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것을 막 들여다 보아도 되는게 가능한 지 모르겠다.
샬림과 온전한 승인 아래 한 영화작업이더라도
그것이 온전한 일대일 동등한 거래였을까?
마지막, 감독이 말한다. 샬림을 안으면서 슬픔은 끝났다고. 위로의 말이었지만, 화가 난다.
이제 절망은 시작이다. 저 절망의 깊이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이해한다고 하는지.
영화가 끝나도 난 일어날 수 없었다. 울어 퉁퉁 부은 얼굴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가 고민했던 그 고민들이 사치였다고.
그래서 막, 힘들어 울고 싶은 기분도 있었는데
난, 과연 인도에 갈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의 삶을 아무렇지 않게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더 힘들어졌다. 인도는 늘 힘들다. 막연하게 생각할 수 없는 먹먹함이 있다. (2012. 3. 2. 씨네큐브광화문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뒷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 10년간의 긴 세월 속에 샬림에게 삼륜차를 사 줄 수는 없었을까?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감성은 참으로 열정과 여린 감정을 소유한 사람으로
많이 더 아파하고 사회를 보는 눈이 더 따뜻한 사람이지만,
경제적으로 참으로 무능한 것을 알기에 나는 그 의문을 가슴에 묻었다.
그러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나 말고 그런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지 작가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돈을 모아 샬림에게 주었더니, 샬림은 삼륜차 대신 고향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계속 불편했던 진실
그렇게 절망한 사람에게 앵글을 갖다 될 수 있을까?
난 항상, 처참한 현장에서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는 특종 사진기자에게 보냈던 불편한 생각
사진을 하나 건지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순간 저 위험을 구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지 하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한 사람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기록의 힘은 위대하다.
세상에 알려 더 많이 진행되는 유사한 죽음이나 사건을 막아야 한다고.
그러나, 난 내 앞에 보이는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 그 차이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함부로 셔터를 누를 수 없어 그냥 가슴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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